나는 어릴 때부터 단독주택에 살았다.
집 뒤에 논과 산이 펼쳐진 시골이었기에 여름밤이면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층간소음이 뭔지 몰랐던 시절이었다.
독립하며 거쳐간 고시원과 원룸의 방음 수준은 내 상황이 열악해서인지 견딜만했다.
내가 층간소음을 신경 쓰게 된 건 결혼 후 아파트에 입주하고 나서부터였다.
신축 아파트에서 처음 만난 층간소음
운 좋게도 첫 신혼집을 브랜드 신축 아파트로 들어가게 됐다. 전세이긴 했지만 우리가 첫 입주였기에 새 아파트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남편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 집을 고르게 된 것인데 사실 나는 그 당시 돈을 많이 빌리는 게 부담스러워 더 저렴하고 오래된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새 아파트는 좋은 선택이었다. 전세대출로 충분히 빌릴 수 있는 돈이었고 대출이 있다는 압박 덕분이었는지 예상보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깨끗한 집과 주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점이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게다가 신축 아파트는 옆에 사람이 사는지도 모르게 소음이 적었다.
하지만 아파트의 특성상 층간소음은 있었다. 간혹 집들이를 하는 건지 아니면 친구들이 놀러 온 건지 새벽까지 위층 어딘가에서 둔탁한 발걸음 소리들이 들렸던 것이다. 평소 조용한 편이었기에 그런 소리들에 예민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양반이었다는 걸 지금의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오며 알게 됐다.
구축 아파트로 이사 온 후 들리는 노랫소리
지금 아파트는 지은 지 10년은 더 되었다.
집 보러 왔을 때 당시 세입자분께 층간소음이 있는지 물었으나 없다고 했다. 새 세입자가 들어와야 그들도 돈을 받고 나갈 수 있으니 답이 뻔히 정해진 질문이었으리라.
이 집에 들어온 첫날 저녁 7시가 되자 남편과 나는 이 아파트의 방음 수준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집주인과의 사소한 문제가 있었고 골머리를 앓다가 겨우 해결된 참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우렁찬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놀랐으나 곧 깨달았다. 윗집 어디선가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부르는 노랫소리란 걸.
그날은 꽤 피곤했기에 그 소리는 착잡함을 더 가중시켰고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창 밖에 밤새 반짝이는 모텔 불빛, 오후엔 해가 안 드는 것, 물이 새는 수전들, 수도계량기 밸브 고장에 이어 안방 화장실 천장 누수까지 오래된 집의 민낯을 지켜보며 점점 기대를 내려놓고 적응하게 되었다.
층간소음은 처음엔 스트레스였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며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그 열창의 주인공은 일정한 시간(저녁 7~9시 사이)에만 짧게(1~2분)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 노래를 유심히 듣던 남편은
"노래 진짜 잘 부르는데?" 했고 나도 "진짜 열심히 부르더라고. 노래에 진심이야."하고 농담을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매일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데, 오랫동안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오랜만에 들리는 날이면 새삼 그 열정적인 목소리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었다.
말소리가 들리는 안방 화장실
이 아파트는 위아래 방음이 제대로 안 되어 우리 집이 조용하면 다른 층에서 말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언뜻 들리는 목소리로 미뤄보아 윗집이나 아랫집에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쯤 된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특히 안방 화장실에서는 바로 옆방에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깜짝 놀랐다.
물론 평상시에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큰 소리로 말할 때 목소리가 언뜻 들리지만 선명하지는 않기에(화장실만 빼면) 내용은 알 수 없다.
진정한 층간소음, 밤늦게 뛰어다니는 소리
사실 그 노랫소리와 말소리는 별것 아니다. 밤늦게 뛰어다니는 소리에 비하면 말이다.
이사 오고 처음 일주일 정도는 밤 12시까지 시끄러운 소리에 괴로웠다. 집의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어 더 그랬을 것이다.
첫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 날 계단을 올라가다가 다른 층의 현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정다운 인사를 들으니 이해가 됐다.
그 이후로는 밤늦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그쳤다.
가끔씩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는 조용한 저녁시간, 다른 층에서 뛰다가 '쿵'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목소리와 어른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들린 적이 있었다. '아이쿠'하는 마음과 함께 나도 괜히 아이 걱정을 하게 됐다.
이처럼 이 방음 약한 아파트에서는 뭔가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윗집이 웃으면 아랫집도 웃는다, 이게 바로 이웃사촌?
퇴근한 남편과 같이 거실 쇼파에 앉아 있을 때였다. 그날따라 시끄럽던 위층의 분위기 때문에 누군가가 놀러 왔겠거니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층을 통과해 들리는 어른들의 웃음소리.
"하하하하하하. 우리도 같이 웃자 오빠. 이런 게 바로 이웃사촌인가 봐."
갑작스레 따라 웃는 내 모습에 남편은 황당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 삼아 웃은 것인데 실제로 남편과 나는 그 상황이 웃겨서 진짜 웃었다. 층을 넘어 웃음이 번지다니 이게 바로 이 아파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웃사촌의 정이 아닌가?
위층으로 알았던 소음, 알고 보니 아래층
얼마 전엔 또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쫑긋했었다. 윗집이겠거니 했는데, 밖에 나갔다 온 남편이 아랫집에서 손님들이 나오는 걸 보았다고 했다. 이후로 조용해진 걸 보니 아랫집에 손님이 와서 시끄러웠던 것이 맞는 듯했다.
이때까지 소음들은 윗집에서 난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랫집은 필로티 1층인데,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아마 1층이라서 마음 놓고 뛰어논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층간소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유
소음 수준을 생각하면 저번 집이었던 신축 아파트보다 지금 아파트가 훨씬 심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사실 크지 않다.
신축 아파트의 아주 가끔이었던 원인을 알 수 없는 둔탁한 소음에 비해 지금 들리는 소음은 원인을 알 수 있어서가 아닐까?
어린아이, 놀러 온 손님들에 의한 소음은 자연히 역지사지가 된다.
우리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언젠가 생길 수가 있다. 그리고 조카들만 봐도 아이들을 통제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걸 안다.
매일매일 시끄럽지는 않으니 다른 층의 사람들도 노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가 없는 우리집이라고 해서 다른집들에 전혀 안 시끄러울 것은 아닐 것이다. 어른들의 발걸음 소리도 만만치 않다는 걸 나는 안다. 조심한다고 해도 한번씩 생각없이 내딛는 발걸음을 말이다.
오며 가며 가끔 윗집과 아랫집 사람들을 마주친다. 단순히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웃'이라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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