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가 내 삶도 한 뼘 키워줄까요?
곽수혜, 팜파스, 2019
내가 온라인 발레수업을 본격적으로 들은 지 3달째이다.
원래 유연성이 없기에 발레를 한다기 보다는 스트레칭과 근력운동만 하고 있는 수준이다.
작년에 클래스101에서 신청했으나 홈트레이닝의 특성상 처음에만 조금 하고 미루다가, 올해 초 다시 마음먹고 조금씩 시작했었다.
챌린저스라는 어플의 힘을 빌려 제법 몇 달을 했는데, 대상포진에 걸리면서 그만두었다. 지금은 다 나았지만 이미 잃어버린 의욕을 다시 찾지 못한 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이젠 더 이상 발레를 그냥 놔둘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온라인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듣는 동안은 뿌듯했지만, 다음날은 또다시 옷을 갈아입기가 귀찮았다.
의욕을 발레 쇼핑에서 찾아볼까 하고 예전부터 찜해놨던 레오타드를 장바구니에 담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난 백수였지, 하고.
그래서 책에서 의욕과 계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의 희망과 빛인 리디셀렉트에서 발레를 검색해보니 책이 두 권 나왔다.
이 책과 [아무튼, 발레]라는 책이었다.
[아무튼, 발레]는 처음 발레를 시작할 때 읽어보았기에 이번엔 이 책을 펼쳐봤다.
[발레가 내 삶도 한 뼘 키워줄까요?] 제발 이 책이 발레에 대한 내 의욕도 키워주길 바라면서.
[아무튼, 발레]가 발레를 배우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 발레 일기 같은 느낌이라면, 이 책은 그와는 좀 달랐다.
발레를 배우며 느낀 것을 인생의 다른 부분에도 적용하는 느낌이었다.
좌충우돌 발레 일기를 기대했던 나에게 앞부분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어떤 발레 이야기를 하던지 그 끝은 항상 인생 지혜 이야기로 이어지는 점이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예를 들어 발레에서 바르게 서는 자세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면서, 끝에는 삶에서도 바르게 서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식이다.
뒷부분에 가서는 이 책을 쓴 작가의 의도가 원래 그런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발레를 하며 배운 인생의 원리를 일상에서 되새기는 일은 매번 어렵다. 좋은 책을 읽으며 다짐하는 일, 감동적인 강연을 들으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보통 순간에 그칠 때가 많다."
- 본문 중
읽다보니 작가의 취미 발레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진지한 태도가 점점 또렷하게 느껴졌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글을 읽어나갈수록 나도 발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서 이 책을 펼쳐 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가을방학의 '취미는 사랑' 노래 가사로 이 책은 시작되었다.
가사가 너무 예뻐서 나도 바로 그 노래를 틀었다.
꽃이 피어 있는 베란다 탁자 앞에 차 한 잔을 들고 앉아 몽글몽글한 노래를 듣고 있자니 무장해제되는 기분이었다.
노래가사를 음미하며 한 곡을 다 듣고 책의 다음 부분을 이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랑이 취미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처럼 당당하게 '취미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었던 작가가 자신의 진짜 취미를 찾게 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카메라, 목공, 요가, 마라톤, 꽃꽂이를 해보았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지나간 짧은 관심사들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일이 아닌 다른 것은 다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다만 그 재미를 장기간 유지하는 게 어려울 뿐이었다."
- 본문 중
나도 이것저것 많이 건드려본 사람으로써 공감하는 말이다. 다 재미있지만, 다 계속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던 중 작가는 연인과의 이별 후 힘든 마음을 압도할 무언가를 찾다가 취미 발레를 시작하게 된다.
작가가 4년 동안이나 계속 이어오고 있는 취미가 드디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소제목들은 각각의 글을 한 문장으로 잘 설명해준다.
<당혹감을 바탕으로 성취감을 얻으면 인생은 초연해진다.>
여기서부터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소제목 아래에는 발레를 배우며 작가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쓰여 있다.
"발레를 배우면서 타인 앞에서 바보 같은 몸동작으로 몸개그를 펼쳐야 하는 당혹감, 땀을 뚝뚝 흘리며 느끼는 성취감, 나아가 인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초연함까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
- 본문 중
<병이지만, 작고 확실한 기쁨, 장비병>이라는 글에서는
"사실 발레를 잘 하기 위해서는 내 발에 맞는 슈즈 한 켤레와 타이즈, 레오타드 한 벌이면 충분하다.
장비에 쏟아 붇는 돈으로 차라리 레슨 횟수를 늘리는 게 발레 실력이 늘어나는 실질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 본문 중
이 글귀가 내 마음을 찔리게 만들었다. 이미 나는 장비를 다 가지고 있고 더 필요한 건 연습 횟수였음을.
<내 일상이 무대가 될 수 있다>는 글은 특히 멋졌다. 영화 <패터슨>에서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내는 버스 기사가 틈틈이 시를 쓰는 걸 보고 적은 글이다.
"... 일상을 재료로 끊임없이 창의력을 발휘하고 예술성을 실현한다.
이처럼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예술이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비범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밥을 먹는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 관객들은 매일 시를 쓰는 그의 일상이 패터슨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본문 중
나도 전 직장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 계단으로 오를 때, 지친 마음속에서도 '나는 발레를 배운다'라고 생각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던 기억이 있다. 그 사실을 떠올리기만 한 것인데도 그 계단이 마치 무대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가 발레리나가 아닐 지라도, 우리가 하는 취미 발레가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을지 여기 나와있다.
발레 수업을 처음 들었을 때 생각했었다. 한 2년쯤 뒤에는 뭔가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발레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 환상이 깨졌다.
"그런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일주일에 두세 시간 투자해서 발레를 잘하게 된다면, (우리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지금이라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서 발레의 길을 걸어야 한다."
- 본문 중
웃음이 나온 글귀다. 그렇지! 그런 거였지. 내가 못 하는게 당연한 거지.
스트레칭도 어려운 나는 2년 뒤에도 뭔가 할 줄 아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척추측만증이 있는 작가의 키가 0.8cm 커졌다니 나도 그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책을 덮을 즈음엔 발레를 배우며 인생에도 적용해보려 노력하는 작가의 태도가 멋지게 느껴졌다.
나도 4년 뒤면 그렇게 될수 있을까?
온라인 수업이 다 끝난 후엔 나도 발레학원을 다니고 싶다. 학원을 다니며 이 책을 다시 본다면 그땐 또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다.
과연 몇 년 후에도 내가 계속 발레를 하고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꼭 발레를 하지 않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작가의 목공처럼 나에게 발레가 스쳐가는 관심사였을 수도 있으니까.
혼자서 홈트레이닝을 하기 때문에 취미발레를 하는 사람을 접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책을 통해 만나고 경험담을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형광펜 긋기>
"'발레 동작 플리에처럼 더 깊이깊이 내려가고,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다시 우아하고 꼿꼿하게 솟아오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플리에를 배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자.'"
"아무도 내가 하는 발레를 알아주지 않지만, 발레는 내 얼룩진 마음을 매만지고 상처 받은 내면을 치유한다."
"하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 내가 목표한 삶과 한 뼘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의지를 불태워야 하는 순간도 필요하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 나태해지려는 자신과 싸우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일상에서도 한 곳만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온 세상이 나의 관심사를 뺏기 위해, 내 시선을 조금이라도 붙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중에 요즘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발레의 즐거움은 나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
"철학자 밀은 '네 스스로에게 지금 행복하냐고 물어보는 순간, 행목은 달아난다.'라고 말했다. 행복은 직접적으로 찾을 때가 아니라 좋든 싫든 간에 우리 인생의 순간순간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을 때 온다."
- [몰입]의 저자 칙센트 미하이가 저자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
"더는 못하겠다 싶을 때 놓아 버리는 게 나라면, 발레를 하는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다섯 번을 더 한다."
"발레 클레스에서 멋진 아라베스크, 아름다운 폴 드 브라, 날렵한 점프, 우아한 레베랑스를 하려는 노력만큼이나 내 삶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던가?"
"소설가 김연수는 말했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 멋진 말이다. 필사를 할 때도 그런 느낌이 좋았다.
"뭔가 해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을 때. 노력의 응답이 어디서도 오지 않을 때. 그 순간에 포기한다면 우린 성공의 가능성을 완전히 접어 버리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1%의 가능성에라도 기대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1%의 결실은 있지 않을까."
- 요즘은 계속 이런 말들에 계속 형광펜을 긋게 된다.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이어서 그런가 보다.
"이들은 퇴사가 내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 젊은 날의 도전이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 대학 졸업 후 내가 거쳐갔던 직장들도 시선을 조금만 바꿔보면 '젊은 날의 도전'일 수 있음을 기억하자.
"내가 한 선택이 좋았건 나빴건 간에 그 선택의 결과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건져 올릴 수 있다.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에도 무엇이든 남는다."
"고로 발레를 하면서 도무지 늘지 않는 것에 대해 자책하거나 비관하지 않기로 했다. 발레에 매진하면서 땀을 흘리는 이 시간이 내게 무엇이든 남겨줄 것이다."
- 난 또 자꾸 이런 말만 줄 치고 있다.
"발레를 하며 배운 인생의 원리를 일상에서 되새기는 일은 매번 어렵다. 좋은 책을 읽으며 다짐하는 일, 감동적인 강연을 들으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보통 순간에 그칠 때가 많다."
- 그래서 나도 이렇게 책 기록을 남긴다. 작가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 여기 있네.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 니체"
<정보>
* 발레 관련 영화 : <퍼스트 포지션><그녀의 춤은 끝나지 않았다>
* 월드 발레 데이 : 10월 첫째 주. 공식 홈페이지(www.worldballet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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