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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언책방/책 형광펜긋기

[며느라기] 그 때 내 마음이 왜 힘들었을까

by 후언 2021. 5. 31.

며느라기

 

수신지, 귤프레스, 2018


경상도 가부장적인 집에 태어나 자라면서 나는 생각했다.

절대 가부장적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릴 적부터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명절에는 여자들만 부엌에 모여 음식을 했다. 오빠를 비롯한 남자들은 TV 앞에 둘러앉아 있는 게 당연한 그림이었다. 나는 여동생과 함께 엄마 옆에서 잔심부름을 했다.
[며느라기]에서 민사린이 시댁에서 첫 명절을 보낼 때 여자와 남자가 상을 따로 차려 먹는 걸 보고 놀라는 부분이 나온다. 바로 그게 나의 명절 풍경이었다.

 

대학시절 만난 남편은 가부장적인 것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결혼하고 나서도 할 줄 몰라서 그렇지(그런 거라고 믿는다), 시키면(시켜야만) 집안일도 잘했다.
하지만 결혼은 당사자 둘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경험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얼마 전, 새로 이사한 집에 시어머니가 다녀가셨다.

남편은 무척이나 바빴기 때문에 모든 손님 대접은 내 몫이었다. 나는 몇 주 전부터 손님맞이 준비로 허둥댔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인데 얼굴 볼 시간이 없어 서운해하실까 봐 나라도 같이 차 마시며 몇 시간이고 어머니 말을 들어드렸다.

 

어머니는 며느리와 친해지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몇 번은 들었던 남편 학창 시절 이야기. 공부를 잘했고, 말썽 부린 적이 없었다는 자랑스러운 아들.

적당히 웃으며 네 하고 넘기던 대화는 어느새

아들이 딸보다는 더 의지가 된다. 너희 어머니도 그러시지 않더니.

남자 하는 일에 여자가 간섭하면 안 된다

와 같은 말도 조금씩 섞여갔다. 나는 얼굴이 굳어졌지만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셔다 드린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기분이 안 좋았다. 바쁘게 일하고 온 남편에게 괜히 화가 났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른이고 손님이니 대접해드리는 게 맞지 않니? 일 년에 얼마 보지 않으니 이렇게 만날 때만이라도 친해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내가 나쁘고 이기적이기 때문인가?

 

남편은 다음날까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나에게 어디 아프냐 한다.

 

다음날 오후, 속절없이 이어지는 우울함에 나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우울한지, 이 감정이 왜 생기는 건지 알아보고 해결하고 싶었다. 

마침 동아줄처럼 떠올랐던 건 언니가 한참 전에 추천해준 카카오tv 드라마 며느라기였다. 그 당시 무료라고 해서 들어가 봤는데, 이미 유료로 전환되어서 보지 않았었다.

검색해보니 웹툰 원작이었고, 단행본이 출간되어 있었다.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그 책과, 후에 나온 책(며느라기 코멘터리), 그리고 또 다른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심리학 책을 주문했다.

책이 배송되는 동안을 기다릴 수 없어 드라마 며느라기 1편을 먼저 결제해서 봤다.

그리고 나는 내가 '며느라기'를 통과하는 중이란 걸 알게 되었다.

 

아마 결혼하기 전에 봤다면 나도 몰랐을 것이다. 

겪어보니, 그 상황들을 하나하나 느끼게 된다. 드라마를 보며 많이 울었다.

 

배송되어 온 책을 읽으면서도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다.

이 책은 결국 해결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 상황이 일반적으로 발생한다는 것, 불편한 감정의 이유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결혼 후에 찾아온다는 '며느라기'. 결혼 전 인사를 가면서도 밥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해야 할까?를 걱정하는 사람들. 

'저한테 주세요.''제가 할게요.'를 무한 반복하며 시댁에 잘하려 애쓰는 며느리들. 누가 뭐라고 한 것 아닌데도 시댁에 가면 부엌에 들어가 기웃거리고 자연스럽게 일을 도맡는다.

나도 결혼 전엔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불편한 상황들은 생각만 해도 진이 빠지기 때문에 그냥 회피했던 것일 수도.

 

시댁 분위기는 가부장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시집생활을 고되게 겪었던 어머니는 며느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신다. 

그럼에도 나는 며느리라는 틀에 갇혀 애쓰고 있었다.

 

가부장적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남편에게도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남편과 큰 문제없이 같이 살 수 있는 이유는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가 어렵다. 상냥하신 분이지만 어른이기도 하고, 왠지 절대 거스르면 안 될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선 전 직장상사와 같다. 어머니는 전 직장상사가 종종 했던 말처럼, 편하게 대하라고 말하신다. 남편 없이라도 시댁에 놀러 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너의 성격에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고도 말하신다. 그럼에도 딸처럼, 엄마라고 생각하고 오라고 하신다. 나는 감히 다른 말은 하지 못해 네 하고 말았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서, '어머니, 진짜 딸 같으면 방 안에서 잘 나오지도 않을 거예요. 제가 저희 엄마한테는 말대꾸를 얼마나 잘하는데요.'

라고 대답할 쯤이 되면, 그때서야 진정 나 혼자서라도 시댁에 부담 없이 놀러 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머니가 원하시는 것도, 네 대답만 하는 며느리가 아닌, 할 말 하며 자기를 잃지 않는 며느리가 아닐까?

 

내가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시댁과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이런 것 고민 안 하려면 제일 쉬운 답은 한 가지다. 결혼 안 하는 것.

아기를 당장 가질 생각이 없다면 결혼을 미루는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결혼을 할 생각이 있다면 이 책 '며느라기'를 읽어보고 깊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어쨌든 결혼과 시댁이라는 이상한 세계에 들어와 버린 나로서는, 좀 더 현명하고 나를 지키는 대책이 필요하다.
이번 행사는 이렇게 지나갔고, 내가 '며느라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다음 행사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나를 좀 더 생각하자, 이게 지금까지의 내 다짐이다.

현명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사실 이 글을 쓴 지는 몇 달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올리지 못 한 이유는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될까 하는 망설임 때문이었다. 나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혹은 내 주변 사람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얼마 전 팟캐스트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솔직하게 써야 한다고. 내 생각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시간이 얼마간 지나서인지 지금 나는 저 사건이 있던 당시만큼 마음이 타오르진 않는다. 어쩌면 너무 애쓰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 당시의 나의 마음이 잘 반영되었고 다른 누구에게라도(혹은 미래의 나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발행을 하기로 했다.

여러 환경과 요인들에 의해 내 마음 상태가 변하듯이 언젠간 나도 이 글을 읽고 '그땐 그랬지'하고 솜털 같은 마음으로 추억을 넘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형광펜>
"네.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문제는 저희가 의논해서 결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형님 정혜린

- 민사린의 임신한 형님에게 '자연 분만해야 한다''애 낳을 때 남편도 같이 들어가야 하니'와 같은 말을 하는 시어머니. 형님은 이 같은 사이다 발언을 날린다.


"왜... 앞치마 집에 있어서 그래?" - 무구영

- 시어머니가 아들인 무구영에겐 안 주고 민사린에게만 준 선물. 백화점에서 샀다는 선물. 옷인 줄 알았던 선물.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민사린은 '나도 그런 줄(옷인 줄) 알았는데 앞치마야.'라고 선물의 정체를 밝힌다. 차 안엔 잠시 침묵이 감돌고, 무구영의 예상치 못 한 한마디. 남편은 다 이런 걸까..


"묻지 마세요."

- 이 만화를 보고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하네. 근데 요새 이런 집이 어딨어?' '우리 집은-'. 작가는(그리고 며느리들은) 말한다. 묻지 마세요.


"고민이 설거지라니, 시시하다. 구영아, 그런데 그 시시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 순간들이 자꾸자꾸 떠오르는 걸. 어떡하지?" - 민사린


"정말 미안해. 그런데... 그런데 그냥, 부모님 만나는 날만, 그냥... 그렇게... 있어주면 안 될까?" - 무구영

- 이 책을 읽기 전 스스로도 먼저 했던 생각이었다. 나만 참으면, 그날만 참으면,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나 하나만 희생하면.. 그것도 못 참는 나는 이기적인 걸까?
전 직장에서 나는 직장상사 때문에 힘들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퇴사하고 다른 데 가면 되지라는 생각에 버틸 수 있었다. 나에게 시댁은 전 직장상사만큼 어렵고 내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존재인 건 마찬가지다. 직장상사와 시댁의 다른 점. 직장상사는 이직해서 안 보면 그만. 시댁은..?

 

"민사린, 왜 웃고 있어? 좋다 싫다 왜 말을 못 해?" - 민사린

 

"며느라기를 받으면 며느리로서 어찌어찌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는데 예를 들면... 시댁 가면 가만히 앉아 있기가 영 불편해서 차라리 설거지라도 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내가 어리니까 내가 하는 게 맞지, 라고 생각해본 적은요? 아무래도 지금까지 자기 모습과 다르니까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다 며느라기 때문이죠.
새로 들어온 사람이 원래 가족에게 사르르 녹아들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게 저한테도 좋다고요?
"그럼요~ 가족이잖아요, 가족한테 좋은 게 나한테도 좋은 거 아니에요?"

-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건 큰 일이다. 거기서 생기는 불편함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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