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집
노석미, 마음산책, 2011
노석미 작가는 [먹이는 간소하게]라는 에세이 형식의 요리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동생의 책꽂이에 있던 그 책은, 몇 년 전 남해에 있을 때 동생과 함께 방문했던 독립서점 '아마도 책방'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노석미 작가가 그린 그림들과 친절하지 않은 요리법(계량이 따로 없다)이 있는 그 책은 아마도 요리 '에세이'에 더 어울리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던 책을 꺼내볼 생각을 한 건, 어떤 일 때문에 남해에 방문했던 내가 낮동안 아무도 없는 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책 리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동생의 책꽂이를 둘러보며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여러 권 꺼내 방바닥에 쌓아놓았다. 나른한 오후의 햇빛이 들어오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가볍게 이것저것 책을 들쳐볼 계획이었다.
인스타 감성 넘쳐나는 홈카페 책을 넘기며 멋진 사진에 감탄하다가 [먹이는 간소하게]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요리책 같은데 사진은 단 한 장도 없고, 계량도 없고, 소박한 그림과 텃밭에서 난 식재료로 간소한 요리를 해 먹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만 그 삶에 반하고 말았다.
나는 자연 속에서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탸샤 튜더가 내 오랜 이상향이었는데 이제 새로운 이상향이 생기고 있다는 걸 책을 읽으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노석미 작가의 삶은 내가 언젠간 다다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먹이는 간소하게]라는 책에선 그 삶을 조금씩만 엿볼 수 있었을 뿐, 갈증을 달래줄 충분한 이야기가 부족했다. 아쉽게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눈에 띈 '작가 소개'에 쓰인 작가의 다른 책들은 마치 선물과도 같았다.
[서른 살의 집]은 화가인 작가가 가난 속에서 작업을 계속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변두리의 여러 작업장(집)을 이사 다니며 살았던 이야기이다.
짧은 소개글을 읽고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고자 검색을 했다.
놀랍게도 이 책을 파는 인터넷 서점은 없었다. 중고책이 하나 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전자책도 없었다.
이런 상황(읽고 싶은 책을 안 파는 상황)이 거의 없었던 나는 갖고 싶은 열정이 더 솟구치기 시작했다. 희귀할수록(?) 더 갖고 싶어 지는 법.
종이책을 소유하는 것에 보수적인 나는 중고책을 사기 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다행히 남해도서관에 그 책이 있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한자리에 내리 앉아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며 나는 이 책이 '내 인생 책 목록'에 들어가게 되리란 걸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그 중고책을 주문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서른 살의 집]은 내 몇 안 되는 종이책들 속에 소중하게 꽂혀있다.
첫 부분에 등장한 작가의 삶의 태도는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가로서 당장 경제적 수입이 적을지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삶의 방향을 선택한 것 말이다.
"가난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러려면 지속적으로 약간의 재화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 재화를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 본문 중
두 번째 집을 계약하며 모자란 돈 때문에 친오빠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친오빠가 "그렇게 돈을 못 벌면서까지 그림을 그린다고 그렇게 살 필요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라고 멸시를 해도 작가는 그게 스스로 선택한 길임을 알기에 감당한다.
"나와 다른 인생을 계획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던 형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았다. 그런 대가를 치르고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 본문 중
그 선택은 나는 절대 못 할걸 알기에 굉장히 멋지고 대단하다 여겨진다.
내가 꿈꾸는 자연 속의 삶도 경제적 여유가 허락한다면 시도해 볼 생각이지, 지금 당장 나는 실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생활을 거쳐 지금은 안정적인 화가이자 작가가 되었으니,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서울을 벗어나 이사 간 첫 번째 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을 때 번지 말고 '무궁화 울타리 집'이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알아듣는 에피소드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집도 옛날엔 배달을 시킬 땐 '우회도로 가에 OO 3층'이라고 했었다. 지금은 주소를 얘기하지만.
도시를 떠나 변두리 마을로 혼자 이사 가면서 겪게 되는 상황들은 누구나 한 번쯤 걱정하거나 궁금했던 물음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시골살이라고 하면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작가는 처음엔 동네 할머니들에게 뒷담화를 듣고 인사를 해도 무시당한다. 하지만 우연히 옆집 할머니와 목욕탕에서 만나 친해지고 이후로도 이것저것 챙겨드리자 어느새 '이 마을의 착한 아가씨'로 소문나는 에피소드는 통쾌한 반전을 선사한다.
좁은 사회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사람에게 온갖 관심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파마하러 방문한 미용실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새댁'처럼 보이는 작가에게 애는 몇인지,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는지, 왜 애가 없는지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그간 여러 경험을 통해 싱글이라고 얘기하면 왜 결혼을 아직 안 했는지, 주변의 노총각들을 갖다 붙이는 성화에 시달릴 것을 알았기에 작가는 말한다.
"그게...... 사실은 이혼했어요."
그와 동시에 분위기는 얼어붙고 질문은 사라지는 게 작가가 겪어왔던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 미용실에선 잠시 침묵 후 새로운 질문과 토론이 쏟아진다. "잘했어. 살기 힘들면 헤어져야지. 근데 계속 혼자 살 거요? 저 누구네 삼촌 이혼했다던데 그 사람 어때?"
시골에선 이런 관심,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봄비 내리는 날 슬리퍼를 신고 가볍게 떠난 산책은 인적 드문 곳에 있는 트럭을 지나며 갑자기 스릴러로 바뀐다. 산 중턱에 위치한 알 수 없는 공장을 지나서 작가는 길을 잃고 만다. 산속에서 무덤을 만나고 겁이 난 작가는 비탈길을 미끄러지고 긁히며 가까스로 논에 다다르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게 된다. 그 상황 속에서도 캐온 잎사귀가 예쁜 어린 나무를 비를 맞으며 집 마당에 옮겨 심는 모습은 방금 전까지 느꼈던 긴장감과 조급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해소시켜준다.
두 번째 집에서는 소목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만'을 친구로 사귀게 된다. 작가는 인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만은 인도 사람이었다.
어느 날 작가는 만과 함께 출입국관리소에 방문하여 불편한 풍경을 목격한다. 한국말에 서툰 외국인 노동자들은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애를 먹는다.
"언어를 모르면 까막눈이 되고, 알아야 할 상황을 모른다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만들어낸다." - 본문 중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 자신, 듣고 있는지?)
설상가상으로 출입국관리소의 직원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반말을 한다. 만의 차례가 되자 작가는 스스로를 '이 친구 일하는 곳의 사장'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이후로 갑자기 존댓말을 하기 시작한 직원은 아주 쉽게 심사를 끝낸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였다.
이 책의 마지막인 네 번째 집은 작가가 꿈꾸던 '땅을 사고 직접 설계한 집'이다. 아쉽게도 네 번째 집에 대한 글은 한 편이 전부지만, 그 뒤로 사진들이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서른 살의 집]은 작가의 20대 후반부터 30대까지의 변두리 생활을 담고 있다. 그 후 작가의 조금 더 안정된 40대의 삶은 [매우 초록]이라는 책에 나와있고, 그 책 또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화려하거나 치장하지 않으면서 소박하게, 매우 술술 읽히는 작가의 글솜씨는 정말 매력적이다.
이상향이 그리울 때, 대리 만족하고 싶을 때 두고두고 다시 꺼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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