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는 간소하게
노석미, 2018, 사이행성
너무 예쁜 책이다.
책 표지부터 간결한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을 처음 본 건 몇 년 전 남해의 '아마도책방'에서였다. 동생과 함께 방문한 그곳에서 나는 다른 책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이 책은 동생이 구입했다.
'그림 에세이'라고 표지에 적혀 있는데 처음에 언뜻 보기로는 요리책처럼 보였다.
동생의 책장에 잠들어있던 이 책을 내가 펼쳐볼 생각을 한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일이 있어 남해 집에 갔고, 낮에 다른 가족들이 출근한 동안 나는 동생 방에서 혼자 뒹굴거리고 있었다.
늘어지는 오전을 보내고 나서 의욕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을 때, 책장에서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와 바닥에 엎드렸다. 금방 볼 수 있는 간단한 책들 위주였는데, 그중에는 표지에 기가 막힌 커피 사진이 있는 홈카페에 관한 책도 있었다. 휘리릭 넘겨서 읽고는 그다음 책인 [먹이는 간소하게]를 집어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이 책에 이렇게 애정을 가지게 될지 몰랐었다.
평소 거의 혼자 삼시 세 끼를 해 먹는 자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기에 오늘은 뭘 먹을지, 간식은 뭘 먹을지가 나에겐 꽤 중요한 과제였다. 장을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게 재료를 사서 간단하게 요리해 먹을지 늘 고민스러웠다. 요리실력도 없어서 내가 요리한 음식들은 썩 맛있지도 않았다. 요리가 취미라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부러웠다(그 사람과 같이 사는 사람이).
그나마 다행인 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맛에 관대하며 같은 메뉴를 내리 며칠은 먹을 수 있는 무던한 음식 취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올해 초부터는 다짐한 바가 있어서 배달음식은 거의 시켜먹지 않고 스스로 해 먹었다. 되도록 건강한 음식을 먹고자 여러 시도를 했다.
'우리의 식탁'이라는 어플을 추천받아서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 몇몇 요리를 해먹기도 하고(창의성을 발휘하지 말고 레시피대로만 만들면 맛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 사두었던 요리책도 뒤적거리곤 했다(뒤적거리기만 했지 재료가 너무 많이 필요한 것 같아 시도해보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클래스 101에서 샐러드 수업이 있기에 신청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경제적 문제 때문에 생각에만 그쳤다. 반찬 종류를 여러 개 만들어 일주일간 밥만 해서 반찬과 먹기도 했다.
한때는 세 끼를(어쩔 땐 두 끼) 스스로 다 해결하는 게 벅차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크게 개의치 않고 있다. 밥때가 되면 뭘 먹지? 하며 냉장고를 보고 선반을 보고, 내가 해 먹었던 메뉴들을 생각해서 요리를 한다. 그 메뉴들 중에는 이 책을 통해 배운 요리도 있다.
내가 이제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으며 요리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요리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것저것 재료를 많이 써서 맛있는 한 그릇 요리들을 만들어내는 게 그 전까지의 인식이었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안다.
맛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소박한 요리. 이게 지금 내 요리의 방향성이다.
물론 혼자만 먹기에 맛에 신경을 많이 안 써도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먹이는 간소하게] 이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뉘어 있고 계절별로 음식들이 소개된다. 화가인 작가가 그린 간결한 음식 그림과 그 옆장에는 간단한 요리법이 나온다. 순서만 있고 계량은 전혀 나와있지 않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으나 읽다 보니 이해했다. 이 책은 그냥 요리책이 아닌 것이다. 에세이에 가깝다. 순서라도 적어줘서 다행인 기분이랄까.
요리법들은 하나같이 단순해 보인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
마침 남해에서 가져온 마늘종이 많이 있어서 마늘종 파스타를 따라서 해 먹었다.
요리법은 아주 쉽다. 파스타면을 삶고, 마늘종을 볶고 파스타면과 함께 볶고 소금, 후추로 간한다. 끝.
'정말 이게 끝이야?'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직접 해보니 꽤 먹을 만했다.
간단한 조리법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이후로도 마늘종 파스타는 마늘종이 없어질 때까지 종종 해 먹는 메뉴가 되었다.
마트에서 토마토를 싸게 팔고 있어 사 왔다. 이 책에서 본 토마토퓌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가는 기른 토마토들을 수확해서 토마토퓌레를 만들어 냉동시켜놓고 사용한다. 나도 산 토마토 양이 많아 보여서 따라 해 보았다.
끓는 물에 데쳐서 껍질을 벗겨내고 믹서기에 간 후 끓여서 졸인다.
결과물은 생각보다 양이 적었다. 마트에서 토마토를 사 먹는 나로서는 차라리 통조림으로 나온 홀토마토를 사서 쓰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작가는 토마토퓌레, 토마토스프, 토마토스튜 이야기를 연달아서 소개해놓았다. '토마토퓌레'가 뭔지 헷갈렸던 나는 그걸 읽은 후 그것들을 좀 더 명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이 책에서 나온 요리들의 재료는 작가의 작은 텃밭과 자연에서 끊임없이 나온다.
봄에는 주변에서 쑥과 냉이, 달래를 캐서 쑥개떡과 달래달걀밥, 냉이무침을 만들고 여름에는 마당에 있는 나무에서 복숭아와 보리수열매를 수확해서 복숭아조림과 보리수잼을 만든다. 가을에는 고구마줄기무침과 밤당조림, 겨울에는 곶감과 시래기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니 감자 농사나 바질 농사, 딸기 농사 등 농사에 관한 작가의 경험담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물론 모든 게 자급자족은 아니어서 두부요리나 닭요리, 피자나 빵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각 요리마다 그림과 요리법이 소개된 뒤 짧은 에세이가 나온다. 이 에세이를 통해 작가의 자연 속의 삶을 조금씩 엿볼 수 있다. 그렇게 엿본 작가의 삶은 내가 꿈꿔왔던 삶과 닮아있었다.
엎드린 자리에서 단숨에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나는 노석미 작가에게 반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서른 살의 집] 책 리뷰에서도 말했듯이 담담하고 꾸밈없지만 막힘없는 문체가 멋지다.
여기저기 있는 그림들도 너무나 귀엽다. 특히나 고양이들이 같이 있는 그림은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작가는 부엌에 '먹이는 간소하게'라는 문구를 적어서 걸어놓았다고 한다. 조만간 내 부엌에도 그런 글귀를 적어놓고 싶다.
소장해서 종종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형광펜>
"'음식'이나 '요리'가 아닌 '먹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소박하다라거나 간소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 먹고사는 일이 동물의 그것에 비해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간단해요. 캔 다음에 냄새를 맡아봐요. 그럼 알게 돼요. 냉이인지 아닌지. 냉이가 아닌 것은 냉이 냄새가 안 나요."
- 작가가 냉이와 비슷하게 생긴 냉이 옆에 있는 식물을 한 아름 캐오자 이웃이 알려주신 말이다. 나중 언젠가 내 마당이 생기면 캐게 될 냉이의 구별법을 벌써부터 적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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