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꾼 기록 생활
신미경, (주)새움출판사, 2021
대상포진을 겪는 한동안 내 일상은 무너져 내렸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푹 쉬어야 한다는 말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쉬었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백수로 남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시간을 이렇게 날려버려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뭔가를 하려고 하니 무서웠다.
책상에 조금만 오래 앉아있어도 왼쪽 목이 다시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얼마간은 그 생각들을 외면하고 소비적인 하루하루를 보냈다.
바닥을 치게 되면 언젠간 다시 올라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침내 나에게도 뭔가 다시 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언제나 그랬듯이 책이었다.
이 책은 컴퓨터에서 뭔가 검색을 하던 중, 우연찮게 들어간 블로그에서 알게 됐다.
그 블로그는 이 책의 작가가 운영하는 블로그였다.
잘 짜이고 흡입력 있는 글을 읽어보다가 관심이 가는 다른 포스팅도 읽다 보니 스프레드시트 정리법이라는 게 눈에 띄었다. 가지고 있는 옷들을 모두 종류별, 용도별로 기록해놓아 쇼핑을 할 때 그걸 보고 필요한 경우에 구매한다는 내용이었다.
굉장히 유용하다는 듯 확신에 찬 말투에 나도 호기심이 생겼다. 봄이 다가오는 터라 옷 쇼핑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시점이기에 더 그랬다.
알고 보니 '스프레드시트 정리법'은 옷뿐만 아니라 돈, 시간, 건강 등 작가의 전반에 걸친 삶을 정리하는 도구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었다.
여기서 소개되는 '구글 스프레드시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엑셀과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아이폰 등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넘버스'가 있다.
회사를 다닐 때 엑셀은 많이 만져보았는데, 그걸 일이 아니라 내 삶 전반에서 활용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나는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그럼에도 오늘 해야 할 일이나 기억해야 할 일들, 일기 같은 기록들을 기분에 따라 수첩이나 핸드폰 메모장 여기저기에 막 써놓기에 막상 그걸 다시 펼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디에 어떤 기록들이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어쩌다 추억을 되새길 겸 수첩이나 메모장을 하나하나 넘겨보다 보면 운 좋게 발견하거나 하는 식이다.
그래서 한 때 기록 정리에 관심을 가졌고, 에버노트로 정리해볼까 했지만 무료 버전은 기기 제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대 2가지의 기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 아이패드, 아이폰에서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내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 다른 기록 도구를 찾아봐야 했다. 하지만 또다시 기록 도구를 기웃거리며 찾는 것이 귀찮아 기록 정리에 대한 관심 자체를 아예 꺼버렸다.
그러던 차에 이 책에서 새로운 기록 도구와 기록법을 알게된 것이다.
작가는 기록하는 것에 정말 진심이다.
가지고 있는 옷 리스트나 돈 관리 같은 기록은 누구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놀랐던 점은, '구입한 것' 목록을 따로 만들어서 고민하다가 샀던 물건들을 정리해놓고 피드백을 적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소간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산 유기 그릇을 '구입한 것' 목록에 정리한다.
나의 선택이 옳았는지 궁금한 데다 혹여 나중에 다시 사야 한 경우가 생기면 참고할 목적이다. 우습게도 내가 가진 물건의 연대표처럼 느껴져 표 자체에 묘한 소유욕이 생긴다."
- 본문 중
이 부분의 스프레드시트는 책갈피로 표시해놓고 나도 따라서 만들어 보았다.
올해 초 '차'에 관한 책을 읽고 그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에 반해서 한창 다기에 관심이 많았던 때가 있었다. 괜찮은 다기세트가 집에 있으면, 아침 6시에 일어났을 때 명상하고 차 마시며 하루를 더 활기차게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이 눈 앞에서 자꾸 아른거렸다.
하지만 백수이기 때문에 거기에 돈을 쓸 여유가 많지 않았다. 이것저것 찜 해놓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돈보다 소중한 시간이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결국 나는 아주 저렴한 개완과 찻잔 세트를 주문했고, 그것을 '구입한 것'목록에 적었다.
샘플차를 주문해서 막상 써보니 불편하고 크기가 너무 작아서 생각만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내 선택이 틀렸던 것이다. 그 개완과 찻잔은 찬장 속에, 그리고 나의 '구입한 것' 스프레드시트 목록 속에 남아서 내 쇼핑 욕심을 간간이 억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갖고 싶은 욕심이 앞설 때 여러 번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사서 저 찻잔처럼 나의 어리석음으로 남을 것인가.
책을 다 읽은 후엔 '구입한 것' 목록 말고도 많은 부분의 기록을 따라서 만들었다.
당시 나의 핫이슈였던 건강 관련 기록도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잘 사용 중이다.
작가는 크게 아파본 적이 있었기에 건강의 중요성을 느끼고 '몸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건강 관리부'를 열어서 날씨를 적으며 하루를 시작하는데 기상시간, 모닝 요가, 하루 세 끼를 뭘 먹었는지, 간식은 뭘 먹었는지, 걸음수, 샤워, 수면시간 등을 매일 기록하는 것이다. 그 기록은 자기 전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적으며 마무리된다.
매일 이렇게 쓰는 게 가능한 걸까, 궁금한 생각이 드는데 그것에 대한 말도 있다.
"한결같이 의욕적으로 살 수 없는 내게 일정 간격으로 찾아오는 소소한 번아웃 시기에는 기록이 없다.
표에 번아웃 기간의 셀을 합하여 반성문을 쓸 때도 종종 있고, 이런 기록마저도 지난달의 기록을 훑어보면 어떤 일정한 패턴이 있는지, 호르몬 주기나 수면의 질이 나의 기분을 결정한 것이 아닌지 분석할 때 도움이 된다."
- 본문 중
기록이 없는 것 자체도 내 몸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나도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매일 체크하는 것을 잘 못하는데, 기록을 안 한 날도 나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순탄히 기록 중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기록하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그 날의 날씨나 컨디션, 식단 등을 한눈에 다시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픈 뒤부터는 되도록 집에서 건강한 음식을 해 먹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노력이 식단 기록으로 남아있어서 가끔 뿌듯하기도 하다.
그 외에도 예산에 따른 가계부 작성, 의류 리스트, 일과표 체크리스트까지 나도 넘버스로 만들어서 사용 중이다.
아이패드, 아이폰에서 넘버스를 쓸 수 있고, 컴퓨터에서도 아이클라우드 드라이브를 통해 넘버스를 열고 수정할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가처럼 '헬스 케어'를 열어 내 몸 상태를 기록하고, '일과표 체크리스트'를 열어 해야 할 일을 적는다. 모니터 옆 벽에는 책에서 소개된 일과표를 참고해 나의 일과표를 종이에 적어 붙여두었다(일과표대로 하루가 흘러가지는 않지만..).
팔랑팔랑 흔들리던 내 일상이 이 기록들을 통해 바닥에 중심을 잡게 된 느낌이다.
그리고 구글 킵을 활용할 방법을 알게 된 것도 수확 중 하나다. 그동안 마트에서 장 볼 목록 같은 건 아이폰의 메모장 어플에서 체크박스를 만들어서 썼었는데 종종 오류가 났다. 체크리스트 중간에 추가로 글을 쓴다던가 하면 이상하게 체크박스가 사라지는 적이 많아서 불편했는데, 그런 건 이제 구글 킵에 적는다.
'구글 킵' 어플에서 글을 작성할 때도 체크박스를 쓸 수 있는데, 이게 수정하기가 훨씬 편하다.
아쉬운 점은 책을 참고해서 몇 가지 틀을 만드는데 거의 반나절이 다 갔다는 것이다.
참고해서 스스로에게 맞게 수정할 수 있도록 틀이 만들어진 스프레드시트를 다운받을 수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특히 예산 가이드를 만드는 건 예시가 나와 있지만 가계부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글로만 쓰여 있어 만드는데 고민을 많이 해야 했다. 이 스프레드시트를 따라 만들기 위해서 책을 두세 번은 읽을 수밖에 없었다.
"기록으로 남겨져 있기에 내 집의 도어락 건전지 교체 시기가 6개월 주기임을 안다."
- 본문 중
이렇게까지 기록하는 사람이 정녕 존재한단 말인가? 나도 참 기록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되겠다.
'나 자신의 사용 설명서를 갖게 된 기분'이라는 작가의 말이 와 닿는다. 이 기록하는 방법을 지금 만나게 되어 다행이다.
<형광펜 긋기>
"오랫동안 나는 진정한 삶이 곧 시작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언제나 온갖 장애물과 먼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과 바쳐야 할 시간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런 다음에야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마침내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장애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 - 알프레드 디 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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