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동생과 같이 바닥에 엎드려서 스케치북에 이것저것 그리면서 놀았다.
주로 그리는 건 사람 얼굴이었는데 가장 예쁘다고 생각되는 가상의 여자 사람을 그리는 게 제일 재밌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미술시간에 수채화를 처음 그리게 됐다.
이전에 크레파스나 색연필만 써봤던 내게 수채화 물감은 너무나 어려웠다. 적당한 농도를 조절하고 곳곳에 색칠하지 않은 빈 곳도 남겨두는 센스는 나에게 없는 것 같았다.
저학년땐 제법 그림을 잘 그리는 그룹에 속했지만 그림대회를 준비하는 몇몇 사람으로 뽑힐 만큼 특출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며 정말 미술을 잘 하는 친구들은 예고로 진학하고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미술시간은 거의 항상 재밌었다. 소묘를 그리는 것도, 추상화를 그리는 것도, 점토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도 말이다.
이제 미술시간이 없는, 미술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지만 가끔씩 그림그리기를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가족들만 모이는 아주 작은 결혼식을 진행했을 때 필요한 청첩장은 10장 남짓이었다.
그 소규모 청첩장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아직 결혼사진이 없는 우리부부의 얼굴을 모아서 4B연필로 머리를 다듬고, 부케를 쥐어주고, 턱시도를 입혀서 청첩장을 만들었다.
얼마 전엔 남편이 아주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기한은 2주였는데 잊고 있다가 어제에서야 '아 맞다!' 하고 촉박한 마감시간을 맞추려 새벽2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또다른 벼락치기가 새벽1시에 끝났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시간은 1시간 걸린 셈이다.
처음 빈 종이와 그려야 할 사진을 마주할 땐 약간의 의구심이 든다.
'내가 과연 그릴 수 있을까?'
하지만 망설임 없이 종이에 연필선을 그을 수 있는 건 이전의 경험들 때문이다. 나는 내가 비슷하게나마 해낼 것을 안다.
사진과 종이를 번갈아보며 선들을 긋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까지 그리고 제법 형태가 갖춰지면 그때서야 자신감이 확실히 생긴다. 그 뒤부터는 사진을 봐도 귀여운 강아지, 그림을 봐도 귀여운 강아지가 나를 쳐다보고 있어 웃음이 나온다.
나는 아직도 수채화그림은 잘 못 그린다. 내가 잘 그릴 수 있는 것만 그린다.
나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이 많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잘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필선을 긋고 연필을 내려놓을 때, 완성된 그림을 손에 들고 볼 때 내 안에서는 도파민이 팡팡 터진다. 내 통제하에서 무언가를 완결했고 그 결과물을 얻었다는 성취감 때문이다.
그 성취감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해주는 남편의 반응도 내게 큰 만족감을 준다.
내가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도 비슷하다.
영상이 배경음악과 딱딱 맞아떨어질 때 나는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그림그리기와 영상편집은 다른 점이 많다. 그림은 단순한 취미이고 영상편집은 단순한 취미뿐만이 아니기 때문일까.
다른 사람이 잘 그린 그림을 보면 감탄하고 말지만 다른 사람이 잘 만든 유튜브 영상을 보면 기가 죽는다.
그래도 계속 돌멩이 던지는 걸 멈추지 말자.
"무언가를 지속했을 때, 그것이 언제나 성취나 성공으로 남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하면서 생긴 근육이 남는다."
- [회사 말고 내 콘텐츠, 서민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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